
연간 1,500만 명이 찾는 전주한옥마을을 저는 딱 한 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한 번이 너무 강렬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시댁이 광주라 도련님 가족과 함께 방문했는데, "가보면 안다"는 말 한마디에 무작정 따라갔다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꼬박 5시간을 돌아다닌 곳입니다.
600년 역사를 걷는다는 것, 경기전과 전주향교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즉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례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여기서 어진이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가적 성물로, 당시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이곳 앞에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입구의 하마비(下馬碑)를 바라보니 괜히 몸이 바짝 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경기전 안은 생각보다 규모가 아담했습니다.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그 안에서 마주치는 건축물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고풍스럽고 단아한 왕가의 한옥 건물들이 뿜어내는 격조 있는 공간감은 눈을 쉽게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 민가 한옥과는 확연히 다른, 국가 건축물 특유의 위엄이 느껴졌습니다.
입장 전에 미리 역사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시길 권합니다. 전주 이 씨의 발상지라는 사실, 경기(慶基)라는 이름이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이라는 것만 알아도 공간이 다르게 보입니다. 경기전 관람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운영 시간: 매일 오전 9시 ~ 오후 6시 (연중무휴)
- 입장료: 어른 3,000원 / 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 어진박물관은 별도 운영 (저희 방문 시에는 증축 공사로 휴관 중이었습니다)
전주향교는 경기전에서 걸어서 금방 닿는 거리에 있습니다. 향교(鄕校)란 조선 시대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기관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경내에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는데, 거목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경기전과는 또 다른 고요함을 줍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입장료는 없지만,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라 방문 전에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출처: 전주시 문화관광).
전주 콩나물국밥의 정점, 현대옥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콩나물국밥이라는 음식 자체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현대옥에서 한 그릇을 받아 들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현대옥은 1979년 양옥현 여사가 개업한 곳으로, 2008년 맛 비법을 특허 등록하며 프랜차이즈화되었지만 역시 본점이 기본기가 다릅니다. 대표 메뉴는 토렴 방식의 콩나물국밥입니다. 여기서 토렴이란 뚝배기에 재료를 넣고 직접 끓이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만든 육수를 뜨거운 상태로 여러 번 부어 재료에 온기를 입히는 전통 조리 방식입니다. 덕분에 국물이 맑고 깔끔한 맛이 나면서도 시원함이 깊습니다.
수란이 함께 나오는데, 국에 바로 풀어 넣는 것이 아니라 현대옥 김 두세 조각과 국물 몇 숟가락을 넣어 별도로 즐기거나 밥에 찍어 먹는 방식이 이 집만의 먹는 법입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직접 해보니 이 방식으로 먹어야 국밥의 맑은 국물 맛이 온전히 살아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현대옥은 연중무휴 24시간 운영에 가격도 8,000원입니다. 전주비빔밥 못지않게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이 콩나물국밥이라는 것을 이번에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1977년부터 이어온 맛, 베테랑 칼국수
베테랑 칼국수는 1977년에 문을 연 본점이 아직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백화점 입점 지점에서도 먹어봤지만, 제 경험상 본점의 맛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딱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우려낸 멸치 육수 특유의 깊이감이 있습니다.
육수는 멸치 육수를 베이스로 들깨가루와 김가루를 더해 걸쭉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납니다. 여기에 계란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질감이 완성됩니다. 면발은 일반 칼국수보다 살짝 굵고 적당히 쫄깃한 편이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이 굵기가 진한 국물과 잘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반만두도 함께 주문하셨다면 단무지와 같이 드시기를 추천합니다. 얇은 피의 만두와 흰 단무지 조합이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립니다. 가격은 칼국수 8,000원으로 이 퀄리티에 이 가격이면 여전히 충분한 가성비입니다.
주의할 점은 주말에 한옥마을 인근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는 경우가 있어 차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주차 자리를 겨우 찾아 멀리 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며 별도 휴무일은 없습니다.
닭꼬치와 벽화마을, 그냥 지나치면 아쉬운 것들
전주한옥마을의 진짜 매력 중 하나는 골목골목에 숨어있는 길거리 먹거리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게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닭꼬치 가게에서 저는 순한 맛, 동서는 매운맛을 하나씩 주문했는데, 동서가 매운맛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끝까지 다 먹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그 표정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벽화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자연스럽게 정착하며 형성된 달동네로, 2012년 녹색 둘레길 사업의 일환으로 골목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지로 자리 잡은 곳입니다. 여기서 녹색 둘레길 사업이란 도시 내 소외된 주거 지역에 예술적 요소를 더해 지역 재생을 도모하는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도시재생이란 쇠퇴하거나 낙후된 도시 공간에 새로운 기능을 불어넣어 경제적, 사회적 활력을 되살리는 사업을 말합니다.
저희는 이번에 가지 못했지만, 입장료도 관람 시간제한도 없어 언제든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주거 공간이기 때문에 소음이나 쓰레기 문제에 조심하는 매너는 꼭 갖추셨으면 합니다.
한옥마을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 수는 연간 1,500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국내 대표 역사문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 지역은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UNESCO Creative Cities Network)에서 음식 창의 도시로 지정된 전주의 핵심 거점이기도 합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란 문화 다양성을 촉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운영하는 국제 협력 프로그램입니다(출처: UNESCO Creative Cities Network).
전주한옥마을은 오후 1시에 들어가서 6시에 나왔더니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다 못 본 곳이 많았습니다. 다음에 간다면 오전 9시에 딱 맞춰 경기전부터 시작해 동선을 꼼꼼히 짜서 움직일 생각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기에도 정말 좋은 곳입니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공간이라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면 훨씬 풍성한 하루가 됩니다. 아직 가보지 않으셨다면, 일단 가보시면 그 이유를 금방 아시게 됩니다.